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소련군 종심전투교리의 완성 === 한편 소련군의 조직은 스타프카의 주도 하에 대대적인 개편이 시작되었다. 독소전 초반부터 독일군의 강력한 전차 전력에 마주해야 했던 [[소련군]]은 이에 맞설 만한 전차의 생산과 전차 부대의 양성에 급급하느라 본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계획하고 1935년에 완성된 소련식 기계화 제병협동전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 종심전투교리의 [[제파식 전술]]에서 적 전선 돌파를 맡을 제1제대는 투하쳅스키가 생각한 재빨리 움직이고 장갑으로 보병의 기동을 보호할 수 있는 제병협동부대가 아닌 소총병사단들, 즉 '''알보병'''이 전선 돌파를 맡아야 했다. 이 알보병은 각 군단 및 야전군 직할 전차부대와 포병, 공군의 지원이 있었지만, 이런 작전은 항상 소련군에게 출혈을 강요했다. 돌파구 형성 이후에도 문제가 일어났다. 돌파구로 투입되는 전차 부대를 후속해야 하는 기계화, 차량화 부대는 충격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갑차를 비롯한 장갑 운송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대개 전차 위에 기계화보병이 탑승하는 [[탱크 데산트]]를 운용해야 했다. 제대로 된 방호를 받지 못하고 기계화전을 치러야 했던 탱크 데산트들은 소련군의 인력 손실에서 단연 최고를 차지했다.[* 다만 탱크 데산트는 흔히 알려진 장갑차 등의 병력 운송수단 부족이 사용원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탱크 데산트]]항목 참조. 탱크 데산트를 간단히 요약하면 병력 운송 수단이 아니라 '''보병과 전차가 합동전술을 하기 위한 단계 중 하나'''다.] 하지만 [[독소전쟁]]이 끝나고 3개월이란 여유가 생기자 소련군은 다시 제대로 되고 투하쳅스키를 뛰어넘은 더 발전된 종심전투교리를 완성하기 위한 무기, 장비, 그리고 인력을 갖추게 되었다. 소련군은 만주를 완성된 종심전투교리의 실험장으로 삼기 위해 부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많은 경우 소총병사단에는 독립전차여단[* 국군 보병사단 직할 전차부대는 1개 대대꼴이다.], 돌격포연대와 1~2개 포병연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그 결과 소련의 소총병사단들은 사실상 더 막강한 돌파력을 갖춘 제병협동사단으로 재탄생했다. 만주 서부에서 작전적-전략적 침투를 하도록 되어 있던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완전히 편제가 바뀌었다. 2개 전차군단 중 하나는 기계화군단으로 교체되고 2개의 차량화소총병사단이 배속되었다. 이외에도 2개 돌격포여단, 2개 경포병여단 1개 모터사이클 보병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부대가 배속되면서 제6근위전차군은 독소전쟁 때의 어느 전차군보다 훨씬 막강하고 균형잡힌 부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